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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부모 칼럼] 된장아빠의 버터아들 키우기…자원봉사, 입시, 교육

부모가 먼저 자원봉사를 하는 삶을 살다가 자녀에게도 오직 사회에 기여하도록 자원봉사를 하게 하는 부모는 많지 않다. 사실 자녀에게 사회에 대한 책임과 기여를 가르치려고 고민하는 부모들은 자녀들이 아주 어린 나이일 때부터 자원봉사를 하도록 이끌지만, 어린 자녀들이 가서 봉사할 곳도 마땅치 않다. 결국 중고생이 되어서 자원봉사를 하는 경우가 많은데, 이 때가 되면 대학 입시에 필요한 기록을 만들기 위해서라도 자원봉사를 해야한다고 생각한다. 이 때 많은 부모들은 자기 자녀가 자원봉사를 하는 이유가 입시 준비라는 점이 편치 않다. 자녀의 마음에는 사회에 대한 관심도 없고, 스스로 봉사하려는 마음, 남을 이해하려는 마음이 조금도 안 보이는데, 입시에 필요해서 할 수 없이 자원봉사를 하도록 이끄는 것이 양심에 걸린다고까지 말하는 부모를 만난 적도 있다. 실제로, 전혀 마음의 준비가 안 된 학생이 부모의 강요로 자원봉사를 하러 왔다가 다른 학생들과 마찰을 일으키는 경우도 보았다. 정해진 시간에 늦기는 예사이고, 맡은 일을 제대로 안해서 일을 망치는 경우도 보았다. 마음에 없는 자원봉사는 ‘자원(自願)’이 아니기에 다같이 힘들기만 하다. 그런데 입시 준비를 위해 하는 자원봉사는 정말 무의미하고, 기록을 만드는 것 외에는 가치가 없을까? 수년 동안 학생 자원봉사자들을 교육하고, 일을 함께 하면서 그들의 입시를 위해 추천서를 쓰는 나의 대답은 간단하다. 입시 준비 때문에 하는 자원봉사, 부모의 손에 이끌려 시작한 자원봉사라도 자녀들에게는 유익하다. 우선 모든 기관, 단체들은 자원봉사자들을 위한 정기적인 교육이 있다. 이 교육은 부모들이 미처 모르는 사회 문제와 봉사자의 마음 자세, 다른 봉사자들과의 협력 방법을 교육한다. 또 자원봉사자 한 사람의 헌신이 얼마나 소중하고 커뮤니티에 영향을 미치는가를 알려주어 자부심도 심어주며 책임감도 갖도록 한다. 부모의 권유로 시작할지라도 자녀들은 자원봉사의 의미를 깨닫고 자신의 봉사에 대한 긍지를 갖게 된다. 매사에 공정한가(fair)를 따지기 좋아하는 미국 사회에서 자원봉사는 공정성 추구를 넘어서 관용과 사랑, 양보와 이해를 구성원들에게 가르치는 중요한 기능을 수행한다. 특히 자라나는 청소년들에게 커뮤니티의 문제를 생각하게 하고, 타인의 상황을 헤아려보는 기회를 제공한다. 한 학생은 커뮤니티 단체에서 자원봉사를 하기 전에 불법 체류자들은 모두 추방해야 하며, 그들을 위해 식품과 의료 서비스를 제공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자원봉사를 시작한 후, 그들이 가난한 조국에서는 도저히 가족을 부양할 수 없기에 위험을 무릅쓰고 국경을 넘어온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아울러 힘든 일도 마다 않고 한 후 조국의 가족에게 송금을 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자, 마음을 바꾸었다. 불법 체류 신분이기에 인간으로서의 최소한의 권리조차 누리기 힘든 상황에 직면해 있는 그들을 더 이해하게 되었다. 이 세상에는 법과 공정성의 잣대로만 잴 수 없는 상황이 있음을 알게 되었다. 어린 아이들까지 데리고 와서 무료 급식을 받는 빈민들을 보면서 자신이 얼마나 축복받았지를 알게 되었다. 대가족 제도 아래, 사돈의 팔촌까지 연락을 하고, 각종 경조사를 함께 치르던 한국의 문화에서는 자주 구성원간의 갈등도 있는 반면, 타인의 상황을 그만큼 더 많이 생각했었다. 주변 사람의 일에 관심을 가지고 살면서 종종 실례를 하기는 했지만, 주변에 관심을 늘 가지고 공동체 의식을 가지고 살던 한국인들이었다. 이에 반해 미국인들은 핵가족 제도 아래 개인주의를 중요시해 왔고, 법과 계약을 중요하게 여기면서 공정성의 가치를 중시하다 보니, 사회의 한 쪽에서 공동체 의식을 높이며 관용과 자비를 찾는 움직임이 자원봉사의 모습으로 자연스럽게 일어난 것도 같다. 법과 공정성을 추구하다가는 관용과 사랑을 실천할 수 없고, 관용과 사랑만으로는 자칫 무질서해질 수 있는 이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 우리 자녀들이 균형을 잃지 않고 세상과, 사람들과 소통하고 화해하면서 사는 방법을 자원봉사는 알려준다. 어린 아이들이 공부를 진정으로 하고 싶은 생각이 없어도 학교에 입학하여 공부를 하기 시작하면 배우는 것이 있는 것처럼, 자원봉사도 일단 시작하면 얻는 것이 있다. 입시에 필요한 기록을 만들기 위해서 시작해도, 참여하는 동안에 전에 몰랐던 사실을 알게 되고 세상을 더 큰 눈으로 보게 된다. 그러니 우리 자녀의 필요에 의해서 자원봉사를 시작한다고 너무 자책하지 말자. 페어팩스 거주 학부모 김정수 jeongsu_kim@hotmail.com

2010-02-08

[학부모 칼럼] 된장아빠의 버터아들 키우기…배워서 남준다

“저는 멋진 곡을 써서 돈도 많이 벌고 유명해지고 싶어요.” “돈 벌고 유명해지면 뭐 할래?” 좋은 음악을 들으면 직접 그 곡의 악보를 그려서 친구들과 노래하거나 연주하는 아들은 언젠가 멋진 곡을 자기가 써서 돈을 많이 벌고 싶단다. 폭스(Fox) 텔레비젼에서 방영해서 인기를 끈 드라마 ‘글리’(Glee)에 나오는 곡을 듣고, 마음에 들면 그 날 밤에 악보를 완성하는 아들을 보면서, 충실하게 음악 공부를 하면 그런 날이 올 것도 같다는 생각을 한다. 좋은 스승 아래서 음악을 익히면서, 책을 많이 읽고, 인간과 인생에 대한 이해의 폭을 넓히면 좋은 음악을 쓸 수 있겠지. 나는 아들이 중학교를 졸업하고 고교생이 된 후까지도, 후에 경제적으로 안정된 생활을 할 수 있는 분야를 아들이 대학에서 공부하기를 원했다. 그러나 아들에게서 음악을 공부하겠다는 강한 열정을 보고, 아들이 또 실제로 음악을 즐기는 것을 보면서부터는 생각을 바꾸어야 했다. 본인이 하고 싶은 것을 못하고, 하기 싫은 것을 하면서는 도저히 좋은 성과를 낼 수 없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한편으로는, 나의 생각이 내가 살아 온 과거의 시간과 공간으로부터 자리잡은 것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한국에서 개발도상국 시절에 성장한 나의 생각에 의해 미국에서 자란 아들의 미래를 설계하려 하는 것이 말도 안되게 느껴졌다. 게다가 세상은 또 얼마나 빨리 변하는가? 삼성이 소니를 누르고, 현대 차가 미국의 도로를 달리는 세상이 나의 인생에 올 줄은 정말 상상을 못했었다. 그래서 아들이 원하는 것을 공부하고, 과거의 기준이 아닌, 앞으로 다가올 시대에 쓰임이 있는 것을 공부하기를 바라게 되었다. 이제 나는 아들이 음악을 공부하여 음악을 하는 사람으로서 살아가면서, 혼자만 즐거운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을 위한 음악을 많이 만들기를 바란다. 어려운 시대를 사는 사람들에게 기쁨과 희망을 주고, 힘든 상황을 겪는 사람들이 위로를 받을 음악, 다른 문화권의 민족과 다른 대륙의 사람들이 들으면서도 여전히 통하는 음악을 아들이 만들면 좋겠다. 베토벤의 음악이 여러나라에서 여전히 연주되고, 톨스토이의 작품이 각국에서 변역되어 읽혀지는 것처럼. 그래서 나는 아들에게 자주 ‘혼자 사는 세상’이 아니고, ‘함께 사는 세상’이라는 것을 강조한다. 그리고 한 사람이 하는 모든 일은 다른 사람들과 다 영향을 주고 받는 것임을 잊지 말라고 주문한다. 자기만을 위해 사는 사람은 주변으로부터도 인정을 못받으며, 결국 고립된다. 자기는 성취를 하고 즐거운 생활을 할 때에도 고난을 겪는 사람들이 이 세상에 있음을 알아야 한다. 부자가 되는 것만을 목표로 살아가는 것은 이 세상과의 소통을 막은 채로 돈만 벌겠다는 생각과 다름 아니다. 내가 잘 아는 치과 의사인 닥터 리(Dr. Lee)는 일주일에 하루 오후를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쓴다. 돈이 없어서 의료보험이 없는 사람들, 그래서 수년 동안 치과 한 번 가는 것이 불가능한 사람들에게 무료 진료를 제공한다. 성심껏 빈민들을 만나서 치아와 잇몸의 상태를 점검하고 치료하는 그는 가난한 환자들이 더 일찍 왔다면, 치아도 덜 상하고 치료도 불필요했을 것을 말하며 늘 안타까워 한다. 그런 그를 보면서 나는 그가 자기 만을 위해 사는 사람, 부를 축적하는 것을 제일의 목표로 사는 사람이 아닌 것을 느낀다. 만약 온 나라의 의사들이 닥터 리처럼 일주일에 하루 오후를 가난한 환자들을 위해 쓴다면, 온 나라의 병원들이 일주일에 하루 오후를 빈민들을 위해 문 연다면 세상은 분명 더 변하지 않을까? 의사가 되기 위해 공부하는 동안 학자금 융자 받은 것을 갚으려면 그만큼 더 많은 환자를 진료해야 하기에, 젊은 의사들이 시골보다는 도시에서 일하기를 선호하는 것을 비난할 생각은 조금도 없다. 다만, 자기 인생의 어느 시기에는 의사가 부족한 시골 마을이나, 상대적으로 가난한 나라에서 일함으로서, 못 가진 사람들과 덜 가진 이들에게 희망을 주면 좋겠다. 그 모습을 보며, 그런 의사가 되기를 꿈꾸는 아이들이 또 생기는 것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제약사들이 치료약보다는 예방약을 만들기 위해 더 많은 투자를 해왔다면 인류는 많은 병들을 이미 극복했을 것이라는 이야기를 들으면, 마음이 씁쓸한 이유는 무얼까? 또 전쟁과 재난 피해 지역을 가서 위험을 무릅쓰고 진료 활동을 벌이는 의사들의 소식을 들으면 왜 존경심이 들고 마음이 따뜻해지는가? 인생의 목표를 자기의 안위와 부의 축적으로부터, 함께 사는 세상의 변화에 두고 실천하지 않으면, 무슨 일을 하며 살든지 우리는 결국 전과 다름없는 세상에 있게 된다. 지진으로 고통을 겪는 아이티를 돕기 위해 미국의 대중 음악 가수들이 콘서트를 했다. 전세계적으로 많은 단체들과 사람들이 모금 활동을 한다. 모두 다 ‘나’를 위해서가 아니라, ‘남’을 위해서이다. 아들이 살아 갈 세상이 ‘나만을 우선 챙겨야 하는 차가운’ 세상이 아니라, ‘남을 이해하고 도와서 함께 사는’ 세상이 되었으면 좋겠다. 그리고 그런 세상이 오게 하려면, 내 아이부터 말 그대로 ‘배워서 남주는’ 아들이 되도록 이끌어야 하겠다. 페어팩스 거주 학부모 김정수 jeongsu_kim@hotmail.com

2010-02-01

[학부모 칼럼] 된장아빠의 버터아들 키우기…마법의 성

미국 와서 사는 동안에도 우리 음악을 늘 들으면서, 떠나온 조국과 사람들을 그리워 한다. 이 때 ‘우리 음악’이란 한국인이 만들었거나 한국인이 연주한 음악을 말한다. 당연히 음악을 들으면서 음악 자체를 즐기기도 하고, 음악을 처음 들었던 무렵의 일들을 추억하기도 한다. 또 너무 좋은 음악이라고 느껴지는 음악을 들으면, 아들에게도 가끔 느낌을 묻는다. 요즘에야 음악에 관해 말이 많은 아들이지만, 전에는 무덤덤하게 대답을 하곤 했다. 나는 아들이 아름다운 음악을 들으면 아름다움을 느끼기를 원했다. 평안한 음악을 들으면 평안을 느끼기 원했다. 그리고 간혹은, 함께 들었던 노래를 아들에게 불러보라고 권했다. 아들이 부르면 너무 너무 멋있고, 보는 이도 행복할 것 같은 노래들이 있었다. 미국 사는 한국 아이가 한국 노래를 이쁘게 부른다면, 얼마나 아름다울 것인가. “너, 이 노래 좀 불러 봐라.” “이게 뭔데요?” “마법의 성이라는 곡이다. 아름답지 않니?” 아들이 더 크기 전에 어린 목소리로 이 노래를 불러주기를 나는 얼마나 원했던가. 어린 아들을 꼬드기기 위해, 만약 이 노래를 외워서 부르면 약간의 돈을 주겠다는 제안까지도 나는 했었다. 증권분석사 일을 하는 김광진이라는 가수가 작곡하여 부른 후, 수많은 가수들이 불렀고, 유명한 킹스 싱어즈를 비롯한 많은 클래식 연주자들과 합창단들도 연주한 이 노래는, 들으면 들을수록 아름다웠다. 미국에 온 후로는, 밤을 세워 공부하다가 새벽에도 들었고, 워싱턴 디씨의 빈민가에서 퇴근을 해 집으로 오는 길에도 들었다. 그 가사 하나 하나가 너무도 좋아서 항상 들으면 나에게 꿈을 생각하게 한다. 많은 리바이벌과 연주 중 ‘마법의 성’과 가장 어울리는 연주를 한 사람은 아마도 기타리스트인 안형수일 것이다. 안형수는 강원도 양구가 고향인 사람이다. 어린 시절 가난으로 인해 학교를 못다니고, 이발소에서 일하던 그는 어느 날 라디오에서 나오는 클래식 기타의 선율에 매료된다. 잘리운 머릿카락을 치우고, 손님의 머리를 감기던 이 소년은 어렵게 기타를 장만하여 독학으로 기타를 연주한다. 학교를 다닐 형편이 안되었던 그는 검정고시로 대학을 가는데, 대학에서 클래식 기타를 전공한 후, 스페인으로 건너간다. 스페인왕립음악원에서 공부하는 동안 마드리드의 공원과 거리에서 기타를 연주하여 모은 돈으로 생활한 그는 스페인왕립음악원을 수석 졸업했다. 여기까지만이라면 나는 덜 감동했을 것이다. 그의 연주도 덜 기억에 남을 것이다. 안형수는 귀국 연주회를 강원도 양구군민회관에서 했다. 그가 가난으로 인해 중학교를 못가고, ‘승리이용소’라는 간판이 걸린 이발소에서 일했던 고향, 어린 나이에 어른들의 머리를 감기다가 물을 잘못 쏟아 실수했던 이발소가 있는 고향이다. 그는 또래의 다른 친구들이 학교 다니는 것을 보면서 이발소에서 일하는 자신을 어떻게 생각했을까? 그 고향을 그는 힘들게 기억하지는 않았을까? 그 무렵 스페인과 한국을 넘나들며 이미 인정받는 기타리스트가 된 그였지만, 서울의 큰 무대, 유명 무대를 택하지 않고 양구군민회관을 선택한 그의 이야기는 나로 하여금 두고 두고 따뜻함을 느끼게 한다. 지난 주, 아들은 학교에서 탤런트 쑈에 나가 자신이 편곡한 곡을 노래했다. 친구들을 무려 열 한명이나 동원(?)해서 록 밴드와 피아노, 현악 파트를 갖추고는 신나게 노래했다. 아들이 무대에서 노래를 잘 하려고 애쓰기 보다는 친구들과의 연주를 즐긴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아들은 편안해 보였다. 낑낑 거리고 밤늦게 시간을 써서 편곡한 선율도 아름다웠다. 아들에 따르면 각 파트의 연주를 한 친구들이 학교에서 나름대로 인정받는 뮤지션들이란다. 나는 그날 밤, 아들의 음악도 좋았지만, 아들이 그렇게 친구들과 함께 어울려 무언가를 한다는 것이 더 좋았다. 또 늘 까불기만 하는 아들의 부탁을 들어 함께 무대에서 연주한 친구들이 한없이 고마웠다. 이제 이 아이들의 머리에는 그 날의 연주가 추억으로 남을 것이 틀림없다. 세월이 흐른 후 어른이 되어서도 같은 사진을 머리 속에 정리하겠지. 늦은 밤, 집으로 오는 길에 오랫만에 ‘마법의 성’을 아들과 들었다. 안형수의 연주를 들으면서, 이제는 아들에게 이 노래를 부르라고 해도 안 부를 것을 잘 아는 내 자신이 아쉽다. 아들이 더 어릴 때, 이 노래를 같이 불러서 외워 놓지 않았음을 후회한다. 그러나 자신이 꼬마였던 시절부터, 아빠가 자주 듣던 이 노래를 아들이 기억할 것을 생각하면 마음이 훈훈해진다. 아들에게도 ‘마법의 성’과 같은 음악이 있겠지. 페어팩스 거주 학부모 김정수 jeongsu_kim@hotmail.com

2010-01-25

[학부모 칼럼] 된장아빠의 버터아들 키우기···"저, 여자 친구 있어요"

나는 아들이 고등학교를 다니는 동안 여자 친구를 사귈 것이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않았다. 음악 좋아하고 친구 좋아하는 아들이 중창단을 만들어 다른 남자아이들과 함께 노래하는 일에 열심이니, 여자 친구 사귀는데에는 별 관심이 없나 보다 생각했다. 틈나는대로 자기들 부를 노래를 편곡하는 일에 몰두하는 아들에게 여자 친구라는 화제는 어쩌면 상관이 없어 보이기도 했다. 또 매사에 세심하게 신경쓰는 것에 약한 아들은 스스로도 여자 친구를 위해 신경 쓰는 것은 대단히 ‘귀찮은’ 일이라고 말한 적이 있었다. 그래서 ‘귀챠니스트’인 아들이 밤 늦게 누군가와 전화를 하는 모습을 본 적이 없었고, 당분간 아들이 여자 친구 때문에 아내와 나의 신경을 쓰게 할 것 같지도 않았다. 그런데 한 달 쯤 전, 아들이 조심히 말했다. “아빠, 저, 여자 친구 있어요.” “그래?” 그 날 나는 아들에게 여자 친구가 생겼다는 사실에 약간 놀라면서도 마음 속에 곧바로 떠오르는 몇가지 질문을 참고 아꼈다. 아들이 조심스럽게 이야기하는데 행여 내가 궁금해서 묻는 질문들이 아들을 힘들게 할까 염려가 되었다. 언제부터였는지, 몇학년인지, 어느 학교인지, 뭐가 이쁜지, 묻고 싶은 것들이 많았지만, 짐짓 별 일도 아니라는 듯, “그래?” 란 한 마디만 하고 말을 아꼈다. 조금이라도 놀라는 척 했다가는 촌스러운 아빠라는 평가를 받을 수도 있을 것 같았다. 내가 특별한 반응을 안하니 아들은 슬슬 여자 친구에 관해 스스로 이야기를 시작했다. 여자 아이는 9학년이란다. 그래서 같은 학년 친구들 사이에서는 ‘순진한 동생을 꼬드긴’ 선배라는 평가도 나온다고 했다. 아들이 미국 오면서 학년을 올려 들어간 탓에 나이는 두 살 차이라는 계산이 금방 나왔다. 나는 아무 말도 않고 아들이 하는 말을 듣기만 했다. 여자 아이는 엄마 아빠가 모두 명문대에서 공부를 했다고 한다. 또 아들이 학교에서 음악 활동을 하는 것을 보고 호감을 가졌다가 서로 가까워졌단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여자들은 남자들보다 더 음악을 좋아하고, 음악하는 남자들에게 호감을 가진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맘 때 아이들이 이성교제를 해도 오래 가는 경우가 드물고, 또 시간이 흘러 나이를 더 먹고 고교를 졸업하면, 가까웠던 사이가 멀어지기도 한다는 것은 누구나 다 안다. 지나친 탐닉이나 시간을 무절제하게 쓰는 것이 아니라면, 나는 아들이 많은 친구들과 만나면서 사람 대하는 기술과 배려하는 방법을 배우기를 원했다. 대학원 시절에 인간발달론(Human Development)에서 십대와 이십대에 이성 친구를 사귀거나 이성에 관심을 갖는 것은 보통 사람의 일생에 일어나는 당연한 삶의 과정이라고 배운 것도 기억이 났다. 그래서 아들이 여자 친구를 사귀는 것도 긍정적으로 생각하면서, 아들에게 유익할 수 있다는 생각을 했었다. 그러나 정작 아들에게 여자 친구가 생겼다니 신경이 쓰이는 것은 왜일까? 내가 신경을 쓴 이유 중 하나는 아들이 여자 친구의 존재를 말했던 시기에 아들이 한참 대학 원서를 준비해서 보내던 중이었다는 사실이다. 대학 입시의 마지막 과정에서 신중하게 원서를 작성하고 에세이를 써야 하는데, 아들이 여자 친구를 사귄다는 것이 혹시나 방해가 될지 나는 무의식 중에 불편하게 느꼈던 것 같다. 다음으로 신경이 쓰였던 것은 아들이 어느새 커서 여자 친구를 사귀니 나도 점점 나이를 먹어가는 것이 느껴져서 갑자기 세월을 생각하게 된 것이다. 전화기에 저장한 여자 아이 사진을 보여주는 아들의 얼굴을 보면서, 나는 어느새 시간이 많이 흘렀음을 느꼈다. 이러다가 언젠가는 이 놈이 결혼을 하고, 나는 더 나이를 먹을 것이 틀림없었다. 모든 사람들이 가는 길을 나도 가면서 왜 이리 마음이 편치 않을까? 아들에 의하면, 아내는 아들로부터 이야기를 듣더니 제일 먼저 여자 아이가 한국계인지 여부를 확인했다고 한다. 이름으로는 도무지 알 수 없는 것이 인종과 민족이라, 아내는 까놓고(?) 물어 본 모양이다. 내가 아무 말도 안하고 듣기만 한 것과 조금은 다르게, 아내는 몇가지를 물어 본 것 같다. 아직도 인종과 민족을 따지냐고 묻고 싶었지만, 그저 궁금해서 물어보았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곧 들었다. 아내와 나는 인종과 민족 때문에 우리 아들이 차별 받는 것이 싫다면 다른 아이들에 대해서도 편견이나 선입견을 가져서는 안된다고 늘 생각해 왔다. 백인들이 현실적으로 우세한 사회이지만, 모든 사람이 인종과 민족의 차이를 넘어, 능력에 의해 평가받고 서로를 존중해야 한다고 믿어왔다. 그래서 나는 아들이 한국계가 아닌 여자 친구를 사귀는 것도 별스런 일은 아니라고 생각하고 싶다. 우리 가족이 지난 12월 말에 두 주를 서울에서 보내는 동안, 아들은 여자 친구에게 줄 선물을 고르느라 제법 신경을 썼다. 자기의 고향인 서울에서 여자 친구에게 무언가 멋진 선물을 주려고 고민하는 모습을 보면서 이제는 아들이 ‘귀챠니스트’는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아들이 누군가를 위할 줄 알고, 배려하는 사람으로 성장하기를 바란다. 페어팩스 거주 학부모 김정수 jeongsu_kim@hotmail.com

2010-01-19

[학부모 칼럼] 된장아빠의 버터아들 키우기···감옥에 있는 아버지

해마다 12월이 되면 미국 스포츠계의 관심은 ‘하이스만 트로피’(Heisman Trophy)를 누가 수상하는지로 모아진다. 8월 말부터 시작되어 3개월 이상 매주 토요일마다 미국인들을 경기장과 TV 앞으로 불러 모으는 대학 미식 축구 경기가 시즌을 마치면서 전문가들과 일반인들의 참여로 선정하여 수여하는 이 상은 75년간 해마다 한 명의 선수에게만 주어졌다. 포지션을 막론하고, 소속 학교의 시즌 성적과도 무관하게, 오직 한 선수의 경기력만을 평가하여 수여하는 이 상은 단순히 기록만으로 주어지지도 않는다. 약팀을 상대로 얻은 좋은 기록들은 강팀을 상대로 얻은 기록들보다 덜 인정받는다. 그래서 시즌 내내 전승을 거둔 학교의 선수들이 이 상을 받는데 반드시 유리하지만도 않다. 대학 팀이 내셔널 챔피언쉽 게임에서 이기는 것이 최우수 팀으로서 인정받는 것이라면, 하이스만트로피를 수상하는 것은 그 해 최우수 선수로서 인정받는 큰 영예이다. 그런데 지난 12월, ESPN -TV로 중계된 하이스만 트로피 시상식은 많은 미국인들을 눈물 흘리게 했다. 그 날, 텍사스대학교, 플로리다대학교, 앨라배마대학교, 네브라스카대학교 등 대학 미식 축구의 전통 명문 학교로부터 참석한 최종 후보 가운데 영예로운 수상자로 선정된 선수는 앨라배마대학교의 마크 잉그램(Mark Ingram)이었다. 열 아홉살의 나이로 2학년에 재학 중인 그는 본래 미시간 주 출신으로서,미시간 주의 고향에서도 그를 지도했던 은사와 친지, 가족들이 기뻐했음은 물론이다. 미식축구의 명문으로 꼽히는 앨라배마대학교 역시 그 동안 단 한 명의 하이스만 트로피 수상자도 배출하지 못했던 터라, 학교 안팍은 온통 축제 분위기였다. 그런데 미국인들은 왜 그 날 시상식을 보면서 눈물을 흘렸을까? 잉그램의 아버지는 뉴욕의 프로 미식축구 팀에서 활약을 한 유명한 선수였다. 아들이 미식 축구 선수가 된 것은 아버지의 영향 때문이었고, 아들에게 아버지는 우상과 같았다. 아버지의 운동 신경을 물려받은 잉그램이 꼬마 시절부터 아버지로부터 미식 축구를 배웠음은 물론이다. 그런데 잉그램 집안에 불행이 닥쳐왔다. 아버지가 범죄에 연루되어 도피 중 체포되었다. 집을 떠나 온 그는 미시간 집에 있는 어머니를 걱정했다. 감옥에 있는 아버지를 원망도 했다. 유명한 프로 선수였던 아버지가 돈 세탁 죄목으로 형을 살면서 감옥에서 자기의 게임을 늘 TV로 본다는데, 다른 선수들의 부모들이 경기장에 와서 응원하는 것을 보면 속도 상했다. 그런 아픔을 이기고, 잉그램은 매경기마다 최선을 다했다. 상대 팀 수비를 밀치며 달리고 달렸다. 그 날 밤, 수상자 발표 후 무대에 오른 잉그램은 다음과 같이 수상 소감을 말했다. “저는 아버지를 사랑합니다. 저는 아버지가 자랑스럽습니다.” 수상 소감을 말하는 잉그램의 눈에 눈물이 흐를 때, 많은 미국인들도 함께 울었다. 나도 흐르는 눈물을 닦아야 했다. 열아홉살 아들이 감옥에 있는 아버지를 자랑스럽게 생각한다고 할 때, TV 화면은 시상식에 함께 온 잉그램의 어머니를 보여주었다. 웃는 그녀의 눈에서도 눈물이 흘렀다. 나의 아버지를 나는 얼마나 자랑스럽게 생각했던가. 나는 아버지께서 감옥에 계셔도 사람들 앞에서 자랑스럽다고 말할 수 있을까. 생각들이 꼬리를 문다. 그리고 연이어 나의 아들은 나를 얼마나 자랑스러워하는지 궁금하다. 아니 자랑스러워하기는 하는지 궁금하다. 언제부터인가 아들의 영어 실력이 나의 영어 실력을 뛰어넘었을 때부터 아들이 나를 바라보는 눈빛에서 존경의 기운이 사라진 것 같다. 또 한 살 두 살 나이를 먹더니만, 자기가 필요로 하는 것을 모두 다 쉽게 못해주는 나를 그 전처럼 보지 않는 것 같다. 미국에 관한 한은 자기가 더 많이 알고 있다는 듯 나를 무시하려 하기도 한다. 아들 친구들의 부모들이 주로 미국인들이고, 모두 당연히 영어를 잘하는 고소득 아니면 고위직들인 것도 맘이 편치 않은 것은 내가 속이 좁은 탓일까? 내가 퇴근해서 집에 도착하면 항상 방으로부터 나와 인사를 하는 아들이 고마울뿐이다. 어쩌면 아내는 더 신경이 쓰일 수도 있다. 내가 그나마 돈을 벌어 주니 아들이 내 말을 듣나 싶을 때가 있는 것처럼, 아내가 맛있는 식사를 차려주니, (나는 종종 아내가 우리 식구의 ‘생사여탈권’을 쥐고 있다고 생각한다. 밥을 안 먹으면 살 수 없기 때문이다) 아들이 아내의 말을 듣나 싶을 때도 있다. 미국에서 학교를 다닌 적 없고, 미국인처럼 사고하지 않는 아내를 아들은 종종 답답하게 생각한다. 돌아보면 나도 아버지를 이해하지 못했던 때가 있었다. 나는 그렇게 살지 않겠다고도 생각했다. 그러나 지금 나는 아버지보다 과연 나은가? 아들로부터 얼마나 존경받는가? 나의 아들은 내가 감옥에 가더라도, 자기에게 좋은 일이 있을 때 사람들 앞에서 나를 자랑스럽게 기억할 것인가? 지난 주 내셔널 챔피언쉽 게임에서 잉그램의 앨라배마대학교는 텍사스대학교를 누르고 우승했다. 잉그램이 터치다운을 기록할 때마다 관중석의 잉그램 어머니는 감회어린 표정을 지었다. 잉그램의 아버지도 중계를 보았을 것은 틀림없다. 페어팩스 거주 학부모 김정수 jeongsu_kim@hotmail.com

2010-01-11

[학부모 칼럼] 된장아빠의 버터아들 키우기···국제화 시대의 지도자로

미국에서 공부하는 한인 자녀들과 한국 유학생들이 장래에 여러 분야에서 세계를 이끄는 지도자로 성장하면 좋겠다. 공부 열심히 해서 자기 혼자 잘 먹고 잘 사는 것만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과 함께 살면서 다른 사람들의 행복과 다른 나라들의 번영까지도 지원하는 지성있고 고귀한 사람들로 자라면 좋겠다. 이를 위해서는 단기간의 성적 관리나 시험 준비, 보다 나은 학교로의 진학 등의 입시 문제로부터 할 걸음 더 나아가, 세계를 보는 시야와 안목을 갖도록 해야하고, 다른 이들의 마음을 헤아리며 손에 잡히지 않는 것을 볼 줄 아는 상상력을 심어 줘야 한다. 청소년 시절에 많은 독서를 하고 신문을 읽어야 하는 이유는 글을 잘 쓰기 위함에도 있지만, 한편으로는 분명 세계를 보는 안목을 키워주기 위함이기도 하다. 오늘날 세계 각국의 지도자들이 중 고등학교에 다닐 때, 그들은 자신들이 후에 지도자로서 만나 싸우게 될 문제들을 전혀 알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역사, 예술 등에 관해 더 많이 공부한 사람, 국제 사회의 질서와 세계 여러 나라들의 보편적 필요 사항을 청소년기부터 많이 접한 지도자가 상대적으로 더 탁월한 지도력을 발휘할 것은 분명하다. 유엔의 반기문 사무총장이 고교 시절에 자신의 미래를 미리 점치고 세계의 기아 문제, 환경 문제, 빈곤 문제, 보건 문제 등을 집중적으로 공부했을 리는 만무하다. 오바마 대통령이 어린 시절, 미국의 의료보험 제도를 철저하게 분석하고 공부했을 리도 만무하다. 그러나 그들이 오늘의 자리에 가기까지에는 어린 시절 그들이 읽은 책들과 신문들이 그들의 눈을 열어주고 길을 제시하였을 것은 누구나 상상할 수 있다. 청소년들은 뉴스를 보아야 하고 세계의 곳곳에서 무슨 변화가 일어나는지를 늘 알아야 한다. 당장 자신과 관계 없어 보이는 문제들, 딴 세상 이야기 같은 소식도 주의깊게 들어야 한다. 우리의 자녀들이 머지 않은 장래에 세계의 지도자가 되고, 한국이 세계를 이끄는 지도 국가가 될 수 있다는 믿음은 우리의 역사로부터 나온다. 한국 전쟁이 끝나고 완전 폐허였던 나라가 50년 만에 세계 10위 내외의 경제 국가로 성장한 것은 단순히 잘 먹고 잘 사는 나라가 된 이상의 의미를 가진다. 자기 말을 못쓰게 하는 혹독한 식민지를 35년 경험한 나라가 연이어 300만 이상의 사망자를 낸 전쟁이 남긴 상처를 극복하고 세계 무대에 등장한 것은 기적과 다름없다. 지금 세계 경제 10위권에 이름을 올린 나라들이 대부분 100년 전에도 10위 권에 있었음을 알면, 한국의 경제 성장은 의미하는 것이 수없이 많다. 지금 고난에 처한 나라들, 발전을 원하는 나라들이 한국을 보면서 용기를 얻고 한국으로부터 배우려 하는 것은 당연하다. 한국이 미래 세계의 지도 국가가 되고, 우리 자녀들이 세계를 이끌 수 있는 가장 큰 근거는 여기에 있다. 근 현대에서 과학 기술을 이용하여 전쟁을 하면서 여러 나라를 식민지로 삼은 적 없는 한국은 전통적으로 사람과 자연을 소중하게 여기고 하나로 여기면서 나도 남도 함께 잘 살기 위해 애써 온 민족이다. 지나가는 과객에게 기꺼이 잠자리를 제공했던 민족, 오래 전부터 남의 논에 모심기와 벼베기를 함께 해 온 민족이다. 흔히 자원봉사 문화가 우리에게는 없었던 것처럼 생각하지만, 함께 일을 하는 ‘품앗이’의 풍습은 우리가 이미 자원봉사를 통해 서로 돕는 삶을 살았다는 증거이다. 새마을 운동은 스스로 모여 마을의 일을 함께 한 아주 큰 규모의 자원봉사 캠페인이자, 한 국가를 변모시킨 국가적 사업이었다. 그러니 우리에게 높은 수준의 국민 의식이 이미 있었고, 그저 잘 먹고 잘 살기 위해서만 애써 온 우리들이 아니었음을 다 함께 인식하면 좋겠다. 국민 모두가 평균적으로 배고픈 시절을 보낼 때, 배고픔을 극복하고 개인의 경제적 부를 이루는 것을 행복의 척도로 삼는 것은 당연했다. 남들을 생각할 겨를이 없었으며, 이웃을 돌아볼 틈도 없었다. 나부터 바로 서기 전에 남을 챙기는 것은 꿈도 못꾸었다. 그러나 부모들이 자랄 때와는 현저하게 다른 시대를 사는 자녀들에게는 더 큰 시야를 갖도록 이끌어야 한다. 우리의 자녀들은 앞서가는 일방의 유익을 추구하지 않고, 쌍방의 유익을 만드는 국가간 협력의 무대에서 신뢰할 수 있는 지도자로 성장해야 한다. 지난 100년 동안, 식민지 생활과 전쟁의 아픔을 겪은 국가가 가난을 이기고 산업화와 민주화에 성공한 후 세계 무대에서 자기 소리를 내게 된 것은 지구상에 한국밖에 없다. 그렇기 때문에 한국은 빈곤 문제로 싸우는 나라들의 수고를 알며, 경제 발전을 위해 고민하는 국가를 조언할 수 있다. 오늘 세계를 무대로 힘과 돈만으로는 못하는 일을 척척 하는 한국은 장래에 세계를 위해 일할 지도자들인 우리의 자녀들을 바르게 이끌어야 한다. 그리고 그 시작은 부모들의 인식 변화이다. 페어팩스 거주 학부모 김정수 jeongsu_kim@hotmail.com

2010-01-04

[학부모 칼럼] 된장아빠의 버터아들 키우기···권력이냐, 영향력이냐

사회학에서 말하는 권력의 정의는 ‘내가 하고자 하는 것을 남으로 하여금 하게 하는 힘’이이다. 역사적으로 볼 때 남성들이 여성들보다 더 권력을 가져 왔고, 가정에서는 자녀들보다 부모들에게 더 권력이 있다. 한국에서는 연장자가 나이 어린 사람들보다 더 권력을 가진다. 교실에서는 교사가 학생들보다 권력을 가지고 있고, 미국 사회에서는 최근 이민자들보다 오래 살아 온 백인들에게 권력이 더 있다. 국제 사회에서는 유엔의 주도 아래 협력을 하는 모습이지만, 그래도 미국을 위시한 소위 강대국들의 입김을 무시하지 못한다. 국제 사회의 권력을 그들이 가지고 있다. 권력은 여러가지 모습을 하고 있지만, 현대 사회에서는 경제력과 물리적 힘을 바탕으로 형성된다. 한편, 영향력이란 서로 간에 주고 받는 감성의 울림을 동반한 소통이다. 영어 단어의 철자(influence)를 보면, 가운데 flu 가 보이는데, 독감이 퍼져 가듯이 영향력은 주변으로 퍼져 가는 힘이다. 전염되는 힘이다. 그래서 권력이 하지 못하는 일도 영향력은 잘 해낸다. 권력을 의지해서 일하는 개인과 국가는 주변의 존경을 받기보다는 비난을 받기 쉽다. 권력이 당위성을 전제로 사람들을 움직일 때 영향력은 마음에 감동을 주어 스스로 움직이게 한다. 고등학교 시절에 공부를 게을리 해서 꼴찌를 했을 때, 나는 담임 선생님의 시선을 피했다. 조회와 종례 시간에도 선생님의 눈을 피하려고 고개를 숙이고만 있었는데, 하루는 나를 교무실로 부르셨다. 나는 담임 선생님께서 나를 호되게 야단치실 줄 알고 무거운 걸음으로 교무실로 갔다. 저조한 성적을 기록하다가 결국은 반에서 꼴찌를 했으니, 선생님은 나를 혼내실 것이 틀림없었다. 그러나 선생님께서는 나를 야단치지 않으셨다. “힘내라, 너는 잘 하는 게 있잖아? 한 번 나쁜 성적을 받았다고 너무 실망하지 마라.” 나는 27년 전에 선생님께서 하신 그 말씀을 아직도 기억한다. 학교 중창단에 선발되어 많은 행사에 나가 노래를 하던 나를 눈여겨 보신 선생님께서는 내가 공부를 열심히 하지 않은 것보다는 내가 그 때 잘 하던 것을 언급하셨다. 교무실을 나올 때, 나의 발걸음은 가벼워졌고, 집으로 가는 길에는 콧노래가 나왔다. 내가 후에 대학을 가고, 미국 대학원에 유학을 가게 된 것은 순전히 그 분의 영향력 덕분이다. 58명 중 58등이라는 최악의 상황에서도 어린 제자의 장점을 보시고, 제자가 다시 활기 있게 학교 생활을 하도록 하신 선생님의 한마디는 아직도 내 귀에 남아있다. 선생님은 교사의 권력보다는 영향력을 택하셨다. 시간이 흘러 나도 아들을 이끄는 부모가 되었다. 나는 아들에게 권력으로 교육을 했던가, 영향력으로 이끌었던가. 청소년기를 지나는 아들에게 부모로서의 권력으로 이래라 저래라 지시를 해도 아들이 말을 안들은지 오래다. 모든 일을 내가 원하는 대로 원하는 만큼 아들이 할 수 없음을 깨달은지도 오래다. 2010년을 맞이하는 아들에게 부모로서의 권력은 별 의미가 없어 보인다. 반면에 힘주어 강조하지는 않았지만, 함께 즐기던 것들을 통해 아들이 나의 영향을 다소 받은 것은 틀림없어 보인다. 나는 아들이 음악을 공부하겠다고 할 줄은 정말 몰랐었다. 그러나 시간이 갈수록 그것이 우리 가정의 영향력이었음을 느낀다. 공부만 하기보다는 연극, 뮤지컬, 합창, 밴드, 학생회 등의 활동을 하면서 대인 관계를 넓히도록 내버려두었는데(?), 아들은 그런 활동을 통해 많은 영향을 받았다. 학교를 옮기신 후에도 아들의 입시를 위해 추천서를 써주신 선생님은 아들에게 영향을 끼쳤음이 틀림없다. 돈 한푼 안받고 아들에게 바이올린을 지도하시는 선생님과, 아들의 곡들을 들어주고 지도해주신 작곡가 선생님들은 아들에게 음악적 영향을 직접 끼쳤을 뿐 아니라, 열정을 가진 사람들이 이해 관계를 뛰어넘어 서로 돕는 것을 알려주셨다. 훗날 자기 같은 아이들을 위해 도움을 주는 아들의 모습을 상상하는 것은 기쁘기만 하다. 영향력은 분명 서로를 하나로 연결하며, 서로를 이롭게 하는 힘이다. 언제까지 내가 아들에게 영향력을 끼칠지, 나의 영향력은 아들에게 얼마만큼인지는 솔직히 알 수가 없다. 그러나 권력보다는 영향력으로 아들을 이끄는 부모가 되고 싶다. 말보다는 모습으로 가르치고 싶다. 하라고 하기 보다는 함께 하면서 아들이 성장하는 것을 보고 싶다. 새삼 영향력을 생각하는 아침이다. 페어팩스 거주 학부모 김정수 jeongsu_kim@hotmail.com

2009-12-28

[된장아빠의 버터아들 키우기] 캘리포니아에서 온 편지

아들이 고등학생이 된 이후, 수도 없는 대학들이 학교 홍보를 하는 자료와 각종 인쇄물들을 보내왔다. 특히 PSAT와 SAT를 보고 나서부터는 거의 매일 아들 앞으로 학교 안내 자료들이 배달되었다. 장학금 안내와 학교 프로그램의 우수성을 보여주는 인쇄물들이 아들의 책상에 수북하게 쌓였다. 귀에 익은 유명한 대학들과 전혀 못들어 본 학교들이 아들에게뿐 아니라 부모인 나에게까지 편지를 보내어 학교를 알릴 때는 그들의 정성에 감탄이 나오기까지 했다. 수많은 학생들에게 이렇게 학교를 알리는 일은 결코 쉬워 보이지 않았다. 그런데 얼마 전에는 학교에서 온 것이 아닌 편지 하나가 아들에게 배달되었다. 캘리포니아의 어느 도시로부터 온 이 편지에는 한 개인의 이름이 발신인으로 적혀 있었다. 무슨 편지인지 궁금했는데, 아들에게 전해주자마자 답이 나왔다. 아들은 소리를 지르면서 방에서 나와 기쁜 얼굴로 내용을 보여주었다. 캘리포니아에서 활동하는 현역 작곡가로부터 온 추천서였다. 아들의 대학 지원을 위해 이미 아들의 지원학교들로 보내어진 추천서를 아들에게도 보내어준 것이었다. 아들은 왜 이리 기뻐할까? 2년 전 아들은 학교에서 열리는 콘서트를 준비하면서, 음악 선생님과 함께 연주 곡목을 선정하고 전체 프로그램을 정하는 일을 도운 적이 있었다. 아들이 워낙 영화 음악을 좋아해서 영화 음악을 선정했고, 또 시대의 흐름을 반영하듯이 게임 음악도 골라졌다. 아들은 그 때 곡을 선정하는 과정에서 자기가 좋아하는 음악을 작곡한 작곡가에게 자문을 구했다. 그리고 미국 동부 버지니아의 한 고등학생이 자문을 요청했을 때, 미국 서부 캘리포니아에 사는 그 작곡가는 뜻밖에도 흔쾌히 도와주었다. 아들은 그 때 영화 음악과 게임 음악들이 연주되면 무대의 큰 스크린에 영화와 게임의 장면들이 보여지는 콘서트를 계획했었다. 작곡가는 아들의 열성에 감동했는지 아들을 잘 도와주었고 인연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그래미상 등 각종 음악상에 후보로 이름을 올리고 또 수상을 하기도 한 그 작곡가가 한 번 앨범을 발매하면 세계 곳곳에서 판매되며 많은 팬들로부터 사랑을 받는다. 그의 곡들이 버지니아의 한 공연장에서 연주되던 날, 아들은 백스테이지 패스(Back stage Pass)를 받아 연주인들과 작곡가들을 만나는 특혜를 누렸다. 그 작곡가의 배려였다. 아들은 그 날 연주된 곡들을 쓴 여러 작곡가들로부터 씨디에 싸인을 받아서 자랑스럽게 보관하고 있다. 아들은 지난 여름 그 작곡가의 새 앨범이 나왔을 때, 보급 전에 먼저 주문하여 작곡가의 서명이 있는 씨디를 받았다. 그는 아들에게 작곡 과정에서 자신이 메모한 악보들을 기념 삼아 같이 보내왔다. 아들과 그 작곡가의 관계는 거기서 그치지 않는다. 아들은 자기가 쓴 곡들을 그에게 보내어 평가받아 왔다. 자기가 편곡하고 작곡한 것들을 종종 보내어 평가받고 지도받은 후, 고치고 다듬었다. 파일을 보내어 악보와 곡을 동시에 듣고 보는 시대에 아들은 멀리 떨어져 있는 그를 스승으로 삼아 도움받으면서 음악을 즐겨왔다. 그의 곡을 친구들과 함께 수도 없이 연습하여 무대에서 노래했다. 아마도 그는 음악을 향한 아들의 열성을 갸륵하게 보았으리라. 그리고 지난 달 아들은 그에게 조심스럽게 자신의 대학 지원을 위한 추천서를 부탁했다. ‘나는 이 학생의 음악을 향한 열성에 깊은 감동을 받았습니다.’라는 문장으로 시작되는 추천서에는 그 동안 자신이 본 아들의 활동 모습과 아들의 음악 세계, 그리고 노력하는 아들의 모습이 서술되어 있었다. 2년 전에 시작된 인연, 그 후 음악을 통해 가르치고 배우면서 이어 온 관계를 쭉 적은 그는, 그런 사실들로부터 이 학생이 열심히 공부하고 장차 많은 이들을 기쁘게 할 것이라는 믿음을 갖는다고 덧붙였다. 또 어려움이 와도 이겨가면서 음악을 공부할 것이라는 강한 확신을 가지고 있다고 했다. 후반부에는 입학사정관으로 하여금 자신이 전문가임을 알게 하여 신뢰를 얻고자 자신이 몇몇 중요한 상을 받은 현역 작곡가임을 썼는데, 그의 추천서는 내가 보아도 감탄이 나올 만했다. 나는 아들이 음악을 공부하고 싶다고 했을 때, 무척 망설이면서 걱정을 하고 은근히 말리기까지 했었다. 음악은 생활 속에서 즐기는 정도만 하면 좋다는 생각을 하면서 아들이 다른 것을 공부하기를 원했었다. 음악을 전공한다는 것이 그리 쉽게 느껴지지 않았다. 그러나 아들은 그렇게 준비를 해왔나 보다. 스스로 작곡가에게 연락을 취해 자기 곡을 지도받으면서, 친구들과 부를 노래들을 자기 손으로 편곡하면서, 자기가 좋아하는 영화의 한 장면에다가 자기가 만든 음악을 붙여가면서. 부족한 아들을 사랑으로 보아주시는 캘리포니아의 작곡가 선생님께 감사드린다. 페어팩스 거주 학부모 김정수 jeongsu_kim@hotmail.com

2009-12-14

[학부모 칼럼] 된장아빠의 버터아들 키우기···교감과 소통

“아빠, Coldplay가 오는데 보러 가도 될까요?” “보러 가도 되냐는 거니, 아니면 가고 싶다는 거니?” 아들이 콘서트를 보러 가고 싶다고 하는데, 가수의 이름을 듣고도 그 가수가 누군지 즉시 떠오르지를 않았다. 그래도 모르는 척은 안하면서 표를 구입하게 했는데, 아들은 내가 그 가수를 당연히 안다고 생각하는 눈치였다. 그래서 재빨리 인터넷으로 확인해보니, 과연 나도 아는 노래를 부른 그룹이었다. Coldplay는 아들이 그토록 좋아하는 노래‘Viva La Vida’를 부른 영국 록그룹이다. 그들은 수많은 상을 받았으며, 많은 노래를 히트시켰다. 아들이 샤워하면서 가장 많이 부르는 노래가 그들의 노래이다. 아들의 전화기에 가장 많이 저장되어 자주 아들이 듣는 음악들이 그들의 것이다. 방송에서도 그들의 음악이 온통 도배되었다 싶은 정도로 흘러나왔는데, 나는 왜 그 이름을 그 때 몰랐을까? 나는 아들과의 소통에 실패했다. 콘서트 열리는 공연장에 데려다 주고 데려오는 것으로는 아들과의 교감이 그리 강하지 않았다. 늦은 밤. 공부하고 있는 아들 방에 들어간다. 아들의 재산 목록2호인 기타를 들어 조용히 친다. (아들의 재산 목록 1호는 랩탑 컴퓨터이다.) 나는 아들도 아는 노래, 나도 아는 노래를 허밍으로 한다. 그러면 아들은 잠시 공부를 멈추고, 내가 치는 기타에 맞추어 노래를 한다. 미국에서 자란 아들이 부르는 미국 노래의 발음이 좋은 것은 당연한데도, 새삼 매끄럽게 노래하는 아들이 신기할 때가 있다. 함께 노래하다가 화음이 잘 맞으면 아들과 나는 미소를 나눈다. 교감이 되고 소통이 되는 순간이다. 말이 필요없다. 아침에 아들이 늦게 일어나도 마음 약한 아내는 호되게 질책을 하지 않는다. 새벽까지 공부하고 겨우 일어나는 아들에게 먹을 것 챙기는 것이 우선이다. 차에서 먹으라고 밥과 국을 싸준다. 이러나 저러나 학교는 가는 것인데, 왜 조금 더 일찍 일어나지 못하는지 나는 슬슬 화가 난다. 운전을 하면서 아무 말도 안한다. 아들은 엄마가 싸준 밥을 맛있게도 먹는다. 아빠가 지금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아들은 전혀 모른다. 시금치국을 후루룩 마시고는 의자를 뒤로 젖히고 잔다. 참 태평하다. 나는 신호등마다 시계를 보면서 아들이 지각을 할까 걱정을 하는데, 아들은 정말 잘도 잔다. 나 혼자 마음을 졸인다. 교감 제로이다. 주말이 되어 아들과 쇼핑몰에 간다. 이뻐 보이는 십대 여자 아이들이 지나갈 때, 내가 말한다. “저기 빨간 옷 입은 아이 이쁘지 않니?” “아빠는 차-암.” 아들이 한숨을 쉰다. 아들이 보기에는 전혀 안이쁜 여자 아이들을 나는 이쁘다고 하고, 내가 보기에는 그리 놀랍지 않은 아이들을 보고 아들은 이쁘다고 말한다. 내 눈에 이쁜 며느리 만나기는 어려울 것 같다. 교감이 잘 안된다. 내가 중학생 때, 아버지께서는 가끔 내가 듣는 음악을 궁금해 하셨다. FM 라디오를 늘 옆에 두고 살았던 나에게 아버지께서 노래 제목이나 가수 이름을 물어오시면, 나는 칭찬을 받은 것 이상으로 기분이 좋았다. ‘아, 아버지께서도 내가 듣는 음악을 좋아하시는구나.’ 나는 아버지께서 그 당시 세계적으로 인기있던 그룹 ABBA의 음악을 나와 들으시면서 멤버들의 이름을 묻거나 노래 제목을 물으실 때마다 아버지와의 끈을 확인한 것 같았다. 일본 영화 잡지 ‘스크린’ 과월호를 구해서 그 시절 나의 우상 스티브 매퀸의 사진을 보고 있을 때면, 아버지께서도 ‘빠삐용’을 전에 보셨다면서 대화를 하셨다. 나는 아버지께서 공부 외에는 내가 모든 것을 멀리하기를 바라실 줄 알았는데, 그렇게 나의 관심사를 인정하시고 이야기하시는 것이 정말 좋았다. 아버지께서 6.25전에 배우셨다는 기타를 내 앞에서 치시던 날, 나는 새로운 나의 아버지를 만났다. 강직하시고, 원칙만 아시던 공직자였던 나의 아버지는 공부하기 싫어하는 십대 아들 앞에서 기타를 연주하셨다. 나는 아버지도 나와 같은 시기를 지냈음을 그 때 느꼈다. 아버지와 교감하고 소통하는 순간이었다. 나는 아들이 성장하면 아들과 더 말이 잘 통할 줄 알았다. 아들과 무언가를 더 하면서 더 교감하고 소통할 줄 알았다. 그러나 쉽지 않다. 세대 차이를 인정해도, 아들이 커갈수록 나의 기대가 커지기 때문인지, 아니면 아들의 사고 방식이 나보다 미국화가 된 탓인지 모르겠다. 영화 ‘태극기 휘날리며’가 동네 극장에서 상영되던 날, 우리 가족은 극장에 갔었다. 아들과 함께 무언가를 하면서 소통하고 싶었고, 한국적인 무엇인가를 가지고 교감하고 싶었다. 그러나 영화가 끝났을 때, 우리는 각자의 방식으로 영화는 즐겼으나, 많은 대화를 하면서 교감을 하지는 못했다. 소통은 나만의 욕심이었다. 내가 듣고 웃는 이야기에 아들이 같이 웃고, 슬픈 영화를 보면서 함께 울기를 원하는 것은 앞으로도 계속 ‘욕심’일까? 나는 아들과 더 소통하고 싶다. 페어팩스 거주 학부모 김정수 jeongsu_kim@hotmail.com

2009-12-07

[학부모 칼럼] 된장아빠의 버터아들 키우기···자녀의 운전 면허, 부모의 걱정

아들이 운전 면허를 받아서 차를 혼자 운전하게 된 것은 지난 여름이었다. 만 17세가 되기도 전에 아들이 운전 면허를 받은날, 아들은 마냥 기뻤고 나는 걱정이 하나 늘었다. 그 전까지 임시 면허를 가지고 조심하던 아들이 정식 운전 면허를 받고 행여 방심하지 않을지 염려가 되었다. 페어펙스 카운티 가정법원에 와서 운전 면허증을 받으라는 통지에 처음에는 어린 초보 운전자들을 단단히 교육시키는구나 하고 생각했는데, 보호자까지 와야 한다기에 귀찮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러나 학교에서의 교통 안전 교육, 필기 시험, 부모와의 연습, 운전 학교 과정을 마치고도 다시 부모들을 법원으로 불러들이는 이유를 법원에 가고 나서 알았다. 아들과 같은 또래의 아이들과 그들의 부모들이 모여서 교육을 받는 곳은 마치 자녀들의 성인식같은 분위기였다. 교육을 받고 나면 그리도 갖고 싶던 운전면허를 손에 넣는다는 들뜬 기대와 함께 그 곳이 법원이라는 엄숙함이 합쳐져서 아이들과 부모들의 얼굴에는 조용한 설레임들이 그대로 보였다. 출석 확인 후, 시간이 되어 페어펙스 카운티 경찰의 고위직 경관이 나와서 비디오 한 편을 보여 줄 때까지만 해도 나는 그 날의 교육을 통상적인 교육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그 경관이 입을 열어 교육을 시작했을 때부터 모든 참석자들은 그야말로 정신을 바짝 차리게 되었다. 20년 넘게 경찰로 일한 그는 정확한 통계와 자신의 경험을 토대로 이제 곧 운전 면허증을 받을 아이들과 부모들을 교육했다. 그는 매우 놀랍고도 수긍이 가는 내용을 전함으로써 교육 효과를 높였다. 그는 우선 아이들에게 80대 노인이 운전하는 차를 타고 싶냐고 물었다. 감각 기관과 운동 기관의 노화로 운전이 쉽지 않은 노년층에서 사고가 많은 것은 당연한데, 16세와 17세 운전자들의 사고횟수가 80대 노인과 비슷하게 많다는 통계를 제시했다. 그래서 어린 학생들이 운전하는 차를 타는 것은 80대 노인이 운전하는 차를 타는 것과 사고 통계 측면에서 비슷하게 볼 수 있다고 말했다. 자신 만만해 하지 말라는 경고였다. 그러면서 우리 카운티에서 한 해 동안 일어난 크고 작은 교통 사고의 발생 지점을 표시한 지도를 보여주었다. 큰 지도에다가 작은 점으로 사고 지점을 표시했는데 곳곳에 점들이 모여서 마치 색을 칠한 것 같은 부분들이 있었다. 사고가 많았던 지역인데, 모두가 다 고등학교 주변이란다. 더 해설이 필요없는 지도였다. 아이들을 향한 경관의 경고는 계속되었다. 그는 운전 중 문자 메시지를 보내는 행위가 자살 행위라고 힘주어 말했다. 운전 중 시선을 전방으로부터 전화기로 옮기는 아주 짧은 순간에 사고가 일어나니 제발 운전중에 문자 메시지를 보내지 말라고 말했다. 신호 대기 중 차량을 잠시 정지시키는 것은 여전히 운전중이므로 운전에만 신경을 쓸 것을 당부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운전중 문자 메시지를 보내고 받다가 사고를 일으키고 있다고 통계를 제시했다. 모두가 귀를 기울여 그의 이야기에 집중하고 있을 때 그는 통계와 사실의 제시로부터 감성에의 호소 쪽으로 방향을 바꾸었다. 그의 경찰 경력 20년이 넘는 동안 가장 괴로운 일은 십대 운전자의 사체를 찌그러진 사고 차량으로부터 꺼내는 일이었다. 사고 현장에서 마주치는 십대 운전자 사체의 처참함은 말로 할 수 없다. 꽃다운 나이에 운전 부주의로 세상을 떠나는 그들을 생각하면 늘 마음이 편치 않다. 그리고 그들의 사체를 수습하는 일 다음으로 괴로운 일은 사망한 십대의 집을 찾아가 문을 두드리고 자녀의 사망을 통지하는 일이다. 갑자기 자녀의 사망을 마주치는 부모들의 절망을 수도 없이 보면서 그는 자기 직업이 대단히 괴로운 직업임을 새삼 알게 되었다. 운전 면허증을 받기 위해 그 자리에 나온 모든 십대 자녀들과 부모들의 얼굴이 숙연해졌다. 이제 그는 부모와 자녀들에게 마지막 한방(?)을 날렸다. 그는 경관으로서 그가 본 부모들의 심리 상태를 십대 운전자들에게 말했다. 그에 따르면, 십대 자녀가 차를 운전하여 외출하면 부모들은 심리 상태가 ‘비상’ 체제로 전환된다. 걸려 오는 모든 전화를 받을 때 가슴이 뛴다. 혹시라도 크고 작은 교통 사고의 연락이 올까 두렵다. 그리고 멀리서부터 앰뷸란스나 경찰차의 싸이렌 소리가 들려오면 공연히 마음 깊숙한 곳에 ‘혹시’ 하는 걱정이 든다. 그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그 자리의 모든 부모들이 공감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같은 경험을 한 것이 틀림없다. 부모로부터 듣는 이야기를 또 하나의 ‘잔소리’로 여겼던 그 자리의 십대들도 여기까지 그의 이야기를 듣고서는 완전히 공감을 하는 눈치였다. 그 날 판사는 운전 면허증을 아이들에게 주지 않았다. 아이들의 이름을 하나 하나 부르면 부모도 함께 나오게 해서, 축하한다는 말은 자녀에게 하고, 부모에게 운전 면허증을 전달했다. 십대 자녀의 운전과 관련해서 부모에게 책임을 느끼라고 하는 일종의 의식과도 같았다. 수 개월이 흐른 지금 나는 얼마나 걱정을 덜었는지 생각한다. 차이는 있지만 걱정은 조금씩 여전한 것 같다. 사고 없이 운전하는 아들이 고마운데, 항상 차조심하라고 말씀하셨던 아버지의 말씀이 귓가에 울린다. 페어팩스 거주 학부모 김정수 jeongsu_kim@hotmail.com

2009-11-30

[학부모 칼럼] 된장아빠의 버터아들 키우기···한글학교여 영원하라

아들은 지난 주말에 학교 음악 선생님의 부탁으로 학교 밖의 한 행사를 다녀왔다. 음악 선생님께서 참여하시는 어떤 음악회였는데, 아들에게 촬영을 부탁하신 음악 선생님께서는 약간의 용돈도 아들에게 주신 모양이다. 매사에 시간을 돈으로 계산하는 미국의 문화인 것 같기도 하고 제자를 사랑하는 스승이 고마운 마음을 표시한 것으로도 보였다. 아들은 촬영 장비를 챙겨서 혼자 차를 몰고 가서 주말 밤 늦게까지 그 행사를 촬영하고 왔다. 얼마 전만 해도 음악 선생님과 마찰을 빚었던 아들이라 그렇게 선생님께서 아들을 불러주신 것도 각별하고, 아들이 가서 돕는 모습도 보기에 좋았다. “아빠, 유태인들은 미국에서도 이스라엘 국가를 부르더라구요.” 아들은 다음 날 아침, 등교 길에서 자기가 갔던 음악회에서 본 것을 나에게 이야기했다. 아들의 음악 선생님은 유태인이시다. 그리고 그 날의 행사는 유태인들의 음악회였다. 유태인 커뮤니티에서 유태인들이 모여 준비하고 개최한 음악회여서 청중도 유태인이 대부분이었다. 아들은 음악회를 촬영하러 갔기 때문에 음악을 즐기기보다는 기록을 위해 음악 이외의 것들도 눈여겨 보게 되었다. 우선은 장소부터 유대교의 회당이었고, 행사 전반에서 유태인들의 자부심이 넘쳐났다. 아들의 눈에 그 날 가장 인상적이었던 것은 참석한 사람들이 이스라엘 국가를 부르는 장면이었다. 우리도 한인 커뮤니티에서 모이면 행사를 시작할 때 애국가를 부르는데 그것이 왜 그렇게 인상적이었을까? 이스라엘 국가를 부르는 유태인들의 얼굴에서 아들은 그들의 민족적 자부심과 함께 강한 애국심을 보았다. 상투적으로 부르는 것이 아니라 진지함으로 힘있게 부르는 모습에서 아들은 강한 인상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아들은 ‘민족’이라는 주제를 깊이 생각하게 되었다. “잊지 말아라, 너는 한국인이다. 어디를 가든지 우리 스스로를 자랑스럽게 생각해야 된다. ” 아들에게 한마디 하고는 아들이 미국에서 자라는 동안 다양성이라는 주제에 대해 잘 알게 되었을 것이라 생각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여러 민족들에 대한 깊은 이해가 부족하지나 않을지 의문을 가진다. 그저 모두가 미국인으로만 사는 것처럼 생각하지는 않는지. 한국인이라는 정체성을 어느 정도 깊게 인식하는지. 집에서는 반드시 우리말만을 하기로 했던 10년 전의 결정, 그리고 아내와 나의 독한(?) 추진력 덕에 아들이 우리말을 그나마 지키고 있는 것을 나는 대단히 감사하게 생각한다. 미국 사회가 영어로 돌아가는데 집에서는 우리말을 쓰는 것은 어찌 생각하면 엉뚱하고 실제로 쉽지 않다. 그러나 아들이 우리말을 지킨 덕에 아들과 우리말로 마음을 나누면서 살아왔고, 영어를 했더라면 그만큼 만들지 못했을 정서적 유대감도 갖게 되었다. 또 아들이 자신을 한국인이라고 생각하게 하는 가장 큰 요소가 우리말임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다. 서울에서 초등학교에 입학해서 겨우 한 학기만을 마친 아들이 나의 공부 때문에 미국에 왔을 때, 나는 매주 금요일 오후에 아들을 한글학교에 보내었다. 한국 유학생이 그리 많지 않았던 그 도시에 유일하게 있던 그 한글학교는 유학생인 부모들이 모여 자신의 자녀들에게 우리말과 글을 가르치는 소중한 장소였다. 아들은 금요일 오후면 거기서 한국 친구들과 함께 우리말을 배웠다. 그리고 머지 않아 교사부족으로 인해 나도 아이들을 가르치고 있었다. 나는 음악 시간을 만들었다. 부모와 자녀가 함께 알고 부르는 노래가 있어야 한다는 나의 주장에 따라 만들어진 그 음악 시간에 나는 어린 아이들과 함께 놀아 주면서 한글학교를 아이들이 더 좋아하기를 원했다. 매주 간단한 게임을 하고 동요를 함께 불렀다. 눈을 반짝이며 우리말을 따라 하고, 즐겁고 신나게 동요를 부르던 아이들을 나는 사랑할 수밖에 없었다. ‘퐁당 퐁당’과 ‘바람이 머물다간 들판에’를 부르던 아이들의 모습이 지금도 떠오른다. 미국 남부의 지방 도시 한인교회 건물에서 금요일이면 흘러나오던 한국 동요, 한국 어린이들의 노래 소리를 나는 평생 못잊을 것 같다. 나는 거기서 아이들에게 애국가를 가르쳤다. 한국을 떠나 있는 어린 아이들이 그 뜻까지는 몰라도 한국인이라면 애국가를 알아야 하기에 당연하게 여기면서 가르치고 함께 불렀다. 후에 여행길에서 일곱살짜리가 차 뒷 좌석에 앉아 혼자서 애국가를 부르는데 눈물이 나더라는 한 어머니의 이야기는 공부에 지쳐도 늘 그 시간을 준비하고 시간을 썼던 나에게 가장 큰 상이었다. 오늘 미국의 크고 작은 도시의 한인 커뮤니티에서 한글을 가르치고 배우는 한글학교는 그 어느 때보다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한글을 배우는 학생들에게 언어를 넘어 민족 정체성과 자부심을 심어주고 있다. 우리들이 스스로 한민족의 자부심을 잃어버리면 누가 우리들을 존중하겠는가? 한글학교에서 수고하시는 선생님들께 감사의 박수를 보낸다. 한글학교여 영원하라. 페어팩스 거주 학부모 김정수 jeongsu_kim@hotmail.com

2009-11-23

[학부모 칼럼] 된장아빠의 버터아들 키우기···공주는 잠 못이루고

아들의 방에서 음악이 들려온다. 이 밤에 왜 이리 음악은 크게 듣는지. 볼륨을 좀 낮추라고 말한다. 아들의 방으로부터는 파바로티의 음성이 푸치니의 선율을 타고 나온다. 한동안 대중 음악에만 심취해서 유명 그룹의 콘서트까지 다니던 아들이 다시 클래식 음악을 듣는다. 작년에 AP 음악 이론 과목을 공부하면서 아들은 부쩍 음악의 세계로 깊이 들어간 것 같다. 가요, 팝송, 클래식을 두루 들으면서 청소년기를 보낸 나는 아들도 다양한 음악을 듣기를 원해서 늘 많은 음악을 들려주었다. 가족이 함께 떠난 여행 길에는 늘 음악을 챙겨서 들고 갔다. 하루 종일 운전을 해서 몇 개 주를 관통하는 동안 나는 내가 전에 들었던 음악들을 늘 아들과 들었다. 초등학교 졸업 무렵 이미 아들은 비틀즈부터 모짜르트까지를 가리지 않고 듣는 광범위 잡식성의 음악 취향을 갖게 되었다. 미국인 친구들도 모르는 70, 80년대의 미국 대중 음악을 아들은 알고 있었고, 많은 뮤지컬과 오페라를 본 적 없어도 대표곡들은 두루 알고 흥얼거렸다. 순전히 내가 음악을 함께 들었던 탓이었다. 환경은 말없는 교육이고, 가정은 분명 최초이자 최후의 교실이 틀림없다. 나의 초등학교 2학년 시절, 내성적이고 부끄러움을 많이 탔던 내가 덜덜 떨면서도 웅변대회에 나간 적이 있었다. 이순신 장군 탄신 기념 웅변대회였는데, 나에게 웅변 원고를 써주시고 지도해 주신 삼촌이 그 때 우리 집에 함께 사시지 않았다면 나는 그런 추억을 지금 가질 수 없다. 삼촌은 그 때 국문학을 전공하는 대학생이었고, 우리 가족이 살던 일식 가옥의 이층 다다미 방을 쓰셨다. 그 방에서 삼촌은 문학을 공부하셨고, 시를 쓰셨으며, 혈기어린 친구들과 민주주의를 이야기했다. 삼촌의 방에는 책이 많았다. 시집과 소설, 문학 이론, 철학, 미학 등의 책이 책꽂이에 있었고, 늘 원고지가 있던 책상에도 책이 쌓여 있었다. 나는 원고지가 좋았다. 삼촌이 원고지에 글을 쓰시던 모습을 바라보던 나는 학교를 입학하기도 전부터 원고지를 만났고, 거기에 글짓기를 할 때마다 즉시 삼촌으로부터 지도를 받는 행운아였다. 삼촌은 군에 입대하면서부터 우리집을 떠나셨다. 내가 후에 대학에서 독일 문학을 전공으로 삼아 공부한 것은 그런 삼촌의 영향이 컸음을 부인할 수 없다. 직장 생활 중에도 시집을 내며 활동하신 삼촌은 내가 대학생이 되었을 때, 많고 많은 전공 중에서 자신과 같이 문학을 공부하는 조카를 기특하게 여기셨는지, 나를 불러내어 맥주를 한 잔 사주시고는 서점으로 이끌고 가서 책을 한 보따리 사주셨다. 대학 입학식을 앞둔 겨울 밤, 삼촌이 사주신 한 보따리의 책을 들고 집으로 가다가 올려 본 밤 하늘을 나는 지금도 그리워한다. 카프카, 헤세, 하이네, 괴테, 실러를 공부하던 대학 시절, 나는 삼촌의 다다미 방을 자주 떠올렸다. 문학은 나의 삶을 풍요롭게 해주었고, 많은 일을 하는 원동력이 되고 있다. 아들이 지금 듣고 있는 음악은 푸치니의 오페라 가운데 나오는 ‘공주는 잠 못 이루고 (Nessun Dorma)’라는 곡이다. 좀 전에는 파바로티가 부르는가 했더니, 연이어 다른 성악가들의 목소리가 들린다. 아들은 많은 테너들이 부른 것을 연속으로 재생하도록 순서를 잡아놓고 같은 곡들을, 그러나 맛이 다른 곡들을 듣고 있다. 실황을 녹음한 것을 들을 때에는 박수 소리도 나온다. 도대체 같은 곡을 몇 개나 찾았을까 궁금하다. 아들이 이 곡을 처음 들었을 때는 지금으로부터 17년 전이었다. 갓태어나 병원으로부터 집으로 온 아들은 잠을 자다 작은 소리에도 깜짝 깜짝 놀랐다. 원래 아기들은 다 그렇다지만, 자다가 자꾸 놀라는 조그만 아들의 모습이 안쓰러워 나는 집 안에 음악을 계속 흐르게 했다. 무언가 소음을 계속 나게 하는 것이 아기의 놀람을 방지하는 방법이라는 것을 읽었었다. 너무 크지도 작지도 않은 볼륨으로 음악을 계속 흐르게 하니 아들은 과연 놀라지 않고 잘잤다. 카라얀과 베를린필, 조수미, 도밍고, 까레라쓰, 파바로티, 킹스 싱어즈, 로버트 쇼 합창단 등이 생후 1개월이 안된 아들을 위해 하루 종일 연주하고 노래했다. 많은 오페라의 아리아들과 각국의 민요, 또 잘 편곡된 팝송들까지, 나는 아들 인생의 첫 시간에 내가 아는 가장 멋진 음악을 들려주고 싶었다. 내가 좋아한 미샤 마이스키의 첼로 곡들, 리 오스카의 하모니카 곡들, 사운드 오브 뮤직의 음악들을 디제이가 되어 핏덩이에게 틀어주었다. 그 중 ‘공주는 잠 못 이루고’는 워낙 곡의 후반부가 웅장해서 일부러 볼륨을 줄여야 했던 곡이다. 그런데 그 곡을 지금 아들은 제법 큰 볼륨으로 듣는다, 밤인데도. 아들은 자신이 태어난지 얼마 안되어서 우유병을 입에 물고 있을 때 들었던 음악을 기억할까? 음악이 좋아서 음악을 대학에서 공부하겠다는 아들이 대학 입학 원서를 준비하느라 매일 자정을 넘기며 씨름을 하는 날들이다. 환경은 정말 교육이다. 페어팩스 거주 학부모 김정수 jeongsu_kim@hotmail.com

2009-11-16

[학부모 칼럼] 된장아빠의 버터아들 키우기···한국 교육의 장점

“아빠는 이 그림을 어떻게 아세요?” “중고등학교 시절에 배웠지. 한국에서는 그 정도는 다 안다.” 잡지에 나온 미켈란젤로의 그림 ‘천지창조’를 보고 내가 그 화가와 제목을 말하자 아들이 놀라운 얼굴로 나를 쳐다본다. 나는 기회다 싶어 아는 것을 더 말해 준다. “미켈란젤로는 르네상스 시대의 천재 화가이며, 이 그림은 이태리의 한 성당의 천장에 그려진 일종의 벽화지.” 아들의 얼굴에는 도대체 유럽에 간 적이 없는 아빠가 어떻게 그 그림을 아는지 놀라움과 함께 궁금함이 가득하다. 어떻게 알기는. 세계사 시간과 미술 시간에 배우고 달달 외웠지. 그림만이 아니다. 미국이나 유럽의 역사를 내가 말하거나. 유명 오페라의 아리아들을 내가 듣고 설명해 주면 아들은 새삼 아빠가 존경스럽다는 듯 나를 쳐다본다. 평소에도 늘 그러면 얼마나 좋을까. 미국에서 자란 아들이 보기에 나는 자기보다 미국에 대해 아는 것이 없고, 영어도 매끄럽게 하지 못한다. 전체적으로 미국적이지 못하다. 오히려 아들에게 더 한국적이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그래서 한국과 아시아의 정치, 경제, 사회, 문화를 내가 아는 것은 당연하지만, 미국과 유럽의 그것들을 내가 알면 신기하게까지 생각한다. 그러면 나는 두 가지 생각을 하는데, 먼저는 내가 그래도 아들 앞에서 무식해 보이지는 않겠구나 하는 안도감이다. 미국에 사는 죄로(?), 삶속에서 미국적이지 못하고, 미국에 대해 자세히 알지 못할 때마다 아들의 실망하는 눈빛을 참고 견뎌온 나로서는 기회가 오면 부모로서의 체면 복구를 위해 온갖 기억을 되살려야 했다. 아들이 모르는 것까지 알려줄 때 나의 유치한 자존심도 조금은 세웠으니까. 그 다음으로 드는 생각은 한국의 교육이 그래도 좋았다는 것이다. 그 때는 몰랐지만, 내가 한국에서 청소년 시절 받은 교육이 상당히 좋은 교육이었음을 나는 미국에 와서야 알게 되었다. 우선은 나의 유학 시절, 대학원 공부를 하는 동안 내가 한국에서 배운 것들을 토대로 미국 친구들과 공부를 하는데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언어의 다름과 문화의 차이를 제외하고는 거의 모든 면에서 내가 그 전에 배운 것들이 도움이 되었다. 중 고 시절 배운 것들은 고스란히 살아서 나의 공부에 도움이 되었다. 그 깊이는 얕았지만, 중 고 시절 배운 미국과 유럽의 역사, 지리, 문화 등은 자칫 낯설기만 할 뻔 했던 미국에서의 나의 공부를 얼마나 도와주었는지 모른다. 한국에서 교육받고 삼십대에 유학온 나의 지식과 판단력, 비판력은 미국에서 공부하는데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나는 한국의 중고 교육 과정에서 학생들이 지나치게 많은 과목을 공부한다는 주장에 대해 반대하게 되었다. 아들을 보니 미국의 학교들이 가르치는 과목은 한국과 비교할 때 현저하게 그 수가 적은데, 학생들이 공부에 짓눌리지 않고 다양한 활동을 하는 것은 좋지만 그만큼 배움의 양은 부족한 것 같다. 그래서 내가 보기에 대체로 평균적인 미국인들이 평균적인 한국인만큼 폭넓은 지식을 가지고 있지 못하다면 과장일까? 나는 나의 고교 시절, 가을이면 미술 시간에 교정에 나가 색이 변해가는 가을 나무들을 그렸고, 음악 시간에는 세계 여러 나라의 가곡을 배웠다. 세계사 시간에는 가보지 않은 여러 나라들의 역사를 배웠고, 인문 지리와 사회 지리 시간에는 그 나라들의 지방 특산물과 산업의 분포까지도 배웠다. 소위 말하는 주요 과목 이외에도 정치 경제, 사회 문화, 국민 윤리 등의 과목에서 얼마나 많은 것을 배웠는지 모른다. 미국에서 자라는 아들에게는 음악 시간도 미술 시간도 선택일 뿐이다. 한국에 비하면 현저하게 적은 수의 과목들을 공부한다. 그 뿐이 아니다. 미국의 교육은 많은 시간을 공부하며 성취를 위해 고심하도록 아이들을 이끌지 않는다. 정해진 시간, 계획된 것들만 할 뿐 아이들에게 무언가를 악착같이 하게끔 유도하지 않는다. 아이들에게 자유를 주고 존중해 주는 것은 분명 장점이지만, 철없는 아이들에게 일찍부터 자기 주장을 하게 하고, 법은 지키되 타인을 진정 깊이 배려하는 것은 사회 전체적으로 약해 보인다. 법을 최고의 가치로 알고 잘 지키는 사회에서는 질서가 살아있기 때문에 구성원들 내면의 인간적 성숙이나 상호간의 깊은 이해가 다소 부족해도 문제로 드러나기 힘들다. 오직 법을 기준으로 책임 소재를 우선 따지는 곳에서 사제간의 깊은 정이 들기 어렵다. 규정 이외의 것은 절대 있을 수 없다. 오늘 한국의 교육이 문제가 많다는 것은 한국의 교육 그 자체보다도 사회 전체적으로 구성원들의 인식과 문화가 급변하기 때문에 생기는 혼돈이 아닐까? 매사에 더 앞서고 싶어하는 사회 구성원들의 강한 경쟁 심리가 존재하는 한 사교육은 계속 있을 것 같다. 공부 더 해서 더 성취하자는 것을 나무랄 근거는 어디에도 없다. 한국의 교실에서 아이들끼리 서로를 배려하지 않고 괴롭히는 것을 교육의 문제로만 보기보다는 부모와 가정의 문제, 사회 전체적인 문제로 본다면 문제를 잘 모르는 국외자라는 비난을 받을까? 오늘 세계 무대에서 주목받으며 선진국으로 진입하는 한국을 만든 것은 20년, 30년 전의 한국 교육임이 분명하다. 그 때 그렇게 가르치고 배우지 않았던들 오늘의 한국은 있을 수 없다. 오바마 대통령이 한국의 교육으로부터 배우라고 한 것은 깊이 생각할 일이다. 페어팩스 거주 학부모 김정수 jeongsu_kim@hotmail.com

2009-11-09

[학부모 칼럼] 된장아빠의 버터아들 키우기···카운슬러가 추천하는 학교, 부모가 찾은 학교

미국인들이 실질적이고 현실적인 것은 살아 오면서 자주 경험했다. 매사에 안좋게 될 수 있는 경우를 생각하고 지나칠 정도로 만일에 대비한다. 만일의 경우를 대비하는 미국인들의 모습에서는 철저한 ‘유비무환’의 정신이 보이기도 하지만, 책임을 묻고 소송하기를 좋아하는 문화에서 자기를 보호하려는 모습으로도 보인다. 의도보다는 결과를 더 중요하게 따지는 문화에서 사람들은 자신의 말과 행동이 불러 올 결과를 미리 생각하고 말하게 된다. 나의 눈에 미국인들은 아무리 의도가 좋아도 결과가 나쁘면 소송의 대상이 될 수 있다는 생각을 일상 생활 속에서 항상 한다. 오랫동안 함께 일한 동료 사이에도 소송을 하고, 자기가 일하는 직장을 상대로 소송하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조금 과장하면 모든 사람들이 자기 권리를 주장하고 다른 사람들로부터 손해를 보았다 싶으면 거리낌없이 법정으로 간다. 사람들이 말 한마디에도 조심하는 것은 당연해 보인다. 교육 현장에서도 같은 원리가 적용된다. ‘군사부일체’는 꿈 속에나 나올 법한 말이다. 학교를 상대로, 교사를 상대로 소송이 끊이지 않으니 교육 현장의 전문가들도 말을 조심하고 매사를 차갑게 판단한다. 학교는 소송에 대비하여 행정을 챙긴다. 부모가 서명하여 학교에 제출하는 서류의 수만큼 소송 거리가 있다고 보면 된다. 과거에 문제가 되었던 일들이나 문제의 소지가 있는 일에 대해서 학교는 미리 부모들로부터 확인을 받아둠으로써 소송을 피하는 것이다. 철저한 대비와 문제 예방은 분명 장려할 일이다. 나이 어린 자녀들의 미래가 걸린 교육 현장은 마땅히 그러하여야 한다. 그러나 문제를 피하려는 의식이 지나치다 보면 아쉬운 점도 있다. 입시 과정에서 학교 카운슬러가 보여주는 모습은 그 중 하나이다. 아들의 카운슬러 선생님은 아들로부터 존경과 신뢰를 얻는 믿음이 가는 분이다. 종종 만날 때마다 고등학교에서 카운슬러를 하시기에 아주 좋은 성품을 지니셨다는 것과 오랜 경험을 하신 것이 대화에서 감지된다. 아들이 힘들 때 그녀를 찾는다는 것이 여간 고맙지 않다. 그런 그녀도 대단히 냉철한 모습을 보여준다. 아들이 지원할 대학을 선정하는 과정에서 카운슬러 선생님은 전년도 통계를 토대로 거의 확실한 입학 가능성이 있는 학교들만을 아들에게 추천하셨다. 보통 대학을 지원할 때, 입학하기 힘들겠지만 가기를 원하는 학교, 적절하다고 생각하는 학교, 확실하게 입학할 것 같은 학교들을 선정해서 지원하는데, 카운슬러 선생님은 그 중 확실해 보이는 학교들만을 아들에게 권하셨다. 그것도 ‘장담할 수는 없지만’이라는 단서를 달아서. 입시 전문기관에서 전년도 신입생들의 고교 성적과 SAT 점수 등을 조사하여 발행한 책을 보면서 아들이 원서를 낼 수 있는 학교를 찾아본다. 이왕이면 더 인정받는 학교에 아들이 가기를 바라는 것은 나를 포함해 모든 부모들이 하는 생각일 것이다. 그래서 아들의 SAT 점수와 학교 성적으로 원서를 낼 수 있는 학교, 가능성이 있어 보이는 학교를 골라낸다. 카운슬러 선생님께서 주신 학교외에도 훨씬 많은 학교들이 보인다. 카운슬러 선생님께서 아들에게 학교를 골라 주실 때 거기만 지원하라고 하신 것은 아니지만, 은근히 카운슬러 선생님이 원망스럽다. 이왕 ‘장담할 수는 없지만’이라는 단서를 달 바에는 좀 더 눈 높이를 높여주시지, 주신 학교 리스트는 아들의 시야를 좁혀 놓을 수 있다는 생각이 든다. 조금 더 도전해 보도록 하기 보다는 현실적으로 가능한 학교만을 주신 것 같다. 미국의 대학 입시가 정확하게 학교 성적과 SAT 점수만으로 학생을 선발하는 것이 아니기에, 부모와 자녀가 노력하기에 따라서는 가능성 있는 학교의 문을 조금 더 많이 두드려서 입학의 가능성도 조금 더 높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한다. 그리고 아들의 신뢰를 받으시는 카운슬러 선생님께서 왜 그렇게 입학이 가능해 보이는 학교를 조금만 추천하셨는지 다시 생각해 본다. 아무래도 전문 카운슬러로서 무책임해 보이는 말을 아낌으로 책임을 져야 할 일을 피하시려고 하신 것 같다. 용기를 주고 도전해 보라는 의미에서 책임지지 못할 말을 하기 보다는 자신의 일을 토대로 통계에 입각해서 학교를 추천한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그런 카운슬러 선생님의 현실적인 시각에 더해 자녀에게 도전과 용기를 심어주는 것은 부모의 몫이 틀림없어 보인다. 아들이 대학 입학 원서를 작성하여 각 대학으로 보내는 기간이 잘 지나가면 좋겠다. 페어팩스 거주 학부모 김정수 jeongsu_kim@hotmail.com

2009-11-02

[학부모 칼럼] 된장아빠의 버터아들 키우기···부모들의 착각

부족한 능력에도 불구하고 종종 강연을 하러 다른 도시를 간다. 말이 강연이지 미국에서 그 간 겪은 일 들을 다른 부모들과 나누는 모임이다. 초등학교 2학년부터 미국에서 학교를 다닌 아들을 10년 간 지켜본 경험을 들려주고 부모로서 미국에서 무엇을 하는 것이 좋을지를 고민한 이야기를 주고 받는다. 지난 번에는 뉴욕에 가서 뉴욕과 뉴저지 지역의 한인 부모들을 만났는데, 그 자리에서 뜻 밖에도 생각을 같이하는 교육 전문가를 만날 수 있었다. 그는 미국의 한인 부모들이 자녀 교육에 대단히 많은 투자를 하는데도 불구하고, 투자 대비 결과는 그리 좋지 않음을 알게 되어 연구를 통해 사실을 조사하고 논문으로 이를 발표한 사람이다. 교육심리학 박사인 그는 교육에 많은 투자를 하는 한인들의 노력에 긍정적인 평가를 하면서도 미국 내 다른 민족들에 비해서 한인들이 투자에 따른 결과를 잘 거두지 못함을 아쉬워했다. 교육에 대한 투자의 결과를 측정하는 방법에는 무엇이 있을까? 그는 미국 내 최고 명문이라 여겨지는 대학에 입학한 한인 학생들의 졸업률을 조사했다. 그리고 한인 학생들의 졸업률이 유태인, 중국인 등 다른 민족들과 비교했을 때 현저히 낮음을 알게 되었다. 어렵게 준비해 들어 간 명문 대학을 40%가 넘는 한인 학생들이 중간에 그만 둔다는 통계가 발표되었을 때는 한국의 언론까지도 이를 보도했었다. 왜 이런 일이 생기는가? 오래 동안 현장에서 한인 학생들의 대학 입학 지원을 컨설팅해 온 그는 부모들이 바뀌지 않고는 절대 자녀들이 바람직한 결과를 낼 수 없다고 단언한다. 그에 의하면, 많은 한인 부모들은 자녀들이 대학을 가면 자동으로 졸업을 하는 줄 안다. 그러다 보니 대학에 가서 공부할 역량을 심어주려 하기보다는 대학에 입학을 하는 데에만 관심이 있다. 수치로 표시되는 준비에 관심이 많은 한인 부모들은 자녀들을 얼르고 다그쳐서 학교 성적과 시험 점수를 향상시키고 치밀한 계획 아래 봉사 활동과 체육활동도 시킨다. 필요한 만큼의 성적, 점수, 시간, 기록들이 쌓이면 입시 전문 기관에 의뢰하여 가장 멋지고 눈길을 끌게끔 지원서를 작성하고 에세이를 쓴다. 이런 준비들이 나쁘다거나 문제가 있다는 것은 절대 아니다. 철저히 준비하는 것은 오히려 장려되어야 한다. 안타깝지만 그 날 그와 나는 한인 부모들이 ‘교육’이라는 큰 그림은 제쳐두고 ‘입시’에만 초점을 맞추는 경우가 많다는 데에 동의했다. 성장 과정에서 자원봉사를 통해 보람을 느꼈던 부모가 약자를 배려하고 커뮤니티를 위해 시간과 노력을 쓰도록 자녀를 이끄는 것과 아무 경험도 지식도 없는 부모가 오직 입시만을 위해 자녀를 봉사할 곳으로 보내는 것 사이에는 큰 차이가 있을 수 밖에 없다. 전자는 자녀에게 진정한 봉사의 의미를 알려주고 사회의 구성원으로서의 책임감을 일깨워 주지만, 후자는 그저 목표를 위해 준비하고 열심히 사는 것만을 알려준다. 입시를 위해 하는 자원봉사는 따분한 노동이 되기 쉽다. 스스로 사고하고 주변과의 관계를 발전시키면서 커뮤니티의 문제를 보는 내면의 성숙을 시키지 않으면 자원봉사는 자녀에게 도움이 안된다. 남들이 다 하니까 덩달아 하는 각종 활동들은 그야말로 빛좋은 개살구가 될 수도 있다. 나중에는 손도 대지 않을 악기를 남들이 하니까 억지로 연주하는 자녀들에게 기쁨이 있을 리가 없다. 한인 자녀들이 참여하는 활동의 폭은 그리 넓지 못하다. 부모들이 그만큼 미국의 교육을 모르기 때문이다. 그래서 남들이 하는 것을 주로 따라 하는 경우가 많은데 이 때 만나는 사람들이 비슷한 처지의 한인들이라서 몇가지 활동에 한인 자녀들이 몰려있는 경우가 많다. 스스로 생각하고 준비하여 공부하는 능력을 가지게 하기 보다는 빨리 성과를 내기 위해 과외와 학원을 이용하다가 늘 과외를 해야 하는 경우도 있다. 대학을 가서 혼자 공부하기에는 여러가지로 역량이 부족하게 된다. 2009년 미국에서 자라고 있는 자녀들을 자기가 자라던 시절 한국의 기억을 기준으로 삼아 이끌어서는 안되겠다. 자기 자라던 시절의 공부 방식을 자녀에게 꼭같이 강요하고, 그 시절의 인기 전공 과목을 자녀에게 공부하도록 권해서도 안되겠다. 자녀를 위한 것이라는 명분으로 자녀들이 미쳐 소화하지 못하는 것들을 억지로 하게 하면 안되겠다. 뉴욕에서 만난 그 분은 한인 자녀들을 캠프에서 지도하면서 자녀들을 정신적으로 건강하게 만들고 긍정적인 마음가짐을 갖도록 해서 학업에서도 성취를 늘려가도록 이끌지만, 집으로 돌아간 자녀들이 부모와 함께 있으면서 안정을 잃고 공부할 맛을 잃는 경우도 있다고 했다. 종종 부모들이 도움이 안된다는 이야기이다. 착각에서 깨어나 자녀 교육의 틀과 우리들의 인식을 바꾸지 않으면 안되는 시대가 되었다. 과거의 기준보다는 자녀가 살아갈 시대의 환경을 생각하고 자녀가 소질을 발휘할 수 있도록, 어떤 환경에서도 스스로 공부할 수 있도록 역량을 심어주어야 한다. 페어팩스 거주 학부모 김정수 jeongsu_kim@hotmail.com

2009-10-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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